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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 '암살' 과 김무성 친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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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넘어서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부친의 친일 논란이 다시 한번 등장하고 있다.





김무성 대표와 관련한 친일 논쟁은 과거에도 일부인사들이 몇번씩이나 주장해 왔으나 그 설득력이 부족하고 또한 허위 사실로 인하여 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은 해촌(海村) 김용주 선생(1905년~1985년) 이다. 해촌 선생은 교육자이자 기업가이며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서 한국사 여러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해온 인물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거나 일본 자본에 맞서 조선상인회를 설립하는 등 그 누구보다 ‘애국자’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실려 있는 동명이인 때문에 오해를 불러오면서 애국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친일파라는 억울한 의혹을 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의혹은 이미 명백한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여전히 터무니없는 의혹의 여파로 일각에서는 김무성 대표와 해촌 선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무성 대표의 주장대로 해촌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교육 받을 곳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우려해 경영난으로 존폐위기에 처한 영흥학교를 새롭게 설립하였다.

1936년 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포항지역 포항예수교 장로회에서 임시적인 형태로 영흥학교를 운영해 왔는데 일제의 신사참배, 일장기 계양 등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경영난을 겪자 영흥학교는 존폐위기에 처했다.

이를 지켜본 해촌 선생은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털어 교명과 학생들을 인수받아 사실상 영흥학교를 새로이 신설했다.




1938년 해촌 선생은 조선총독부의 지나친 교육 간섭과 규제로 몇 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사학이 말살되고 기본적 인권이 침해됨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당국에 일본인 교원이 아닌 한국인 교원 채용 충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관심과 노력 때문에 일각에서는 해촌 선생을 ‘교육의원’이라고 불렀다.

▲ 사재 털어 영흥학교 신축(1940년 1월 7일자 동아일보-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무성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친께서는 은행원 신분으로 독서회를 만들고 야학에서 가르치다 은행에서 내침을 당했다. 그래서 세운 게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삼일상회’다. 일본 경찰로부터 집요한 상호변경을 압력을 받은 끝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몸도 약한 분이 헌병대·경찰서에 수시로 끌려가는 등 요시찰 인물로 찍혔다”고 설명했다.


▲ 삼일상회 간판을 내려야 했던 이유(1984년 2월 6일자 매일경제-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무성 대표는 부친 문제에 있어서는 당당하고 강경한 대응을 펼쳐온것은 이러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무성 대표는 국회에서 영화 '암살'을 함께 관람하며 친일 논쟁에 대한여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


김무성 대표는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상영회 시작 직전 기자들과 만나 "국민들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심정이 각각 다 다르겠지만 만약 그 시대에 내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떠한 형태로 독립운동 또는 조국을 찾기 위한 애국행위를 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보는 것이 바로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며 "이 영화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좋은 계기로 만들기 위해서 같이 보게 됐다"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는 이어 공식 상영회가 시작되자 환영사를 통해서도 "우리 모두 그 시대로 돌아가서 대한독립 만세를 한번 불러볼까요"라며 관객들과 함께 다시 한번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를 외쳐 눈길을 끌었다.


또한 김무성 대표 부친의 일화가 등장하는 EBS역사 채널 영상도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



http://www.ebs.co.kr/tv/show;jsessionid=nZFh1aC1j6lPkftQ2EFFG2xfQYdODBq12miYwsGAmlOshWq66dBb3SSe1aKUDhga.enswasp02_servlet_engine2?prodId=10000&lectId=3118497



6.25전쟁당시 미군의 서울 포격을 막기위해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군들을 찾아 다니며 서울 포격을 막은 일은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고 하니 당시 김용주 선생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서울의 많은 유적들은 책에서나 볼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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